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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지금] 전쟁때 일터 나간 영국 여성, 보답으로 1918년 참정권 획득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1914~18)을 치를 때 여성들은 인력난 극복에 큰 역할을 했다. 1918년 7월 당시 임금 노동자로 일한 여성은 731만 명을 넘었다. 여성들은 선반을 조작하고 트럭 엔진도 정비했다. 가죽공장.설탕정제소.고무공장에서 일했고 심부름 다니던 소년들을 대신해 배달 소녀들이 등장했다. 10만 명 이상이 농경부대에 지원해 농산물 수확에 기여했다. 군용 말과 노새도 훈련시켰다. 여성들은 경찰.버스 안내원.지하철 경비원 등 남성들의 영역에 진출했을 뿐 아니라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어 술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입대를 선택한 여성도 있었다. '여성육군지원군단'은 사무원.전화교환원.요리사.웨이트리스.운전사 등으로 일하면서 전쟁터로 빠져나간 남성들의 빈자리를 메웠다. 전쟁이 끝날 무렵 여성육군지원군단 대원은 4만 명에 이르렀다. 간호사로 근무하는 여성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무보수 의용군지원부에 소속돼 일하거나 응급처치 간호의용군으로 봉사했다. 간호사들도 어뢰를 맞거나 체펠린 비행선의 공습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더 용감한 여성들은 최전방에서 싸울 수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전방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했던 여성들은 포탄에 폭약을 채워 넣는 일을 맡은 사람들(사진)이었다. 그들은 '카나리아'라고 불렸는데 폭약의 화학물질이 손과 얼굴을 노랗게 물들였기 때문이다. 런던 인근 울리치 무기공장의 경우 전쟁이 시작될 무렵 10명의 여성이 고용돼 있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2만4000명으로 늘었다. 영국 여성들은 전쟁 기간에 중대한 공헌을 했고 그것은 견고한 성(性)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했다. 여성들은 전쟁이 끝난 후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그들의 공헌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1918년 2월에 선거권이 획기적으로 확대돼 여성에게 최초로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1832년의 제1차 1867년의 제2차 1884년의 제3차 선거법 개정에서 남성 선거권이 확대되었고 1918년 제4차 선거법 개정에서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처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이다. 20세 이상 남녀가 평등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은 1928년의 제5차 선거법 개정에 의해서였다. 영국 남녀는 100년간의 험난한 투쟁 끝에 이 값진 권리를 얻어냈다. 1948년 선거권을 '선물' 받은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9-02

[그때와 지금]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천재 무용가 최승희, 북에서 버림받고 사망

2003년 11월 북한의 조선중앙TV는 무용가 최승희가 1969년 8월 8일 사망했다고 전했다. 생사조차 아리송하던 그녀의 최후를 우린 34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된 셈이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1938년 12월 17일 파리 무대에 선 최승희는 “동양 최고의 무용가”라는 격찬을 받는다. 그녀의 초립동춤은 큰 인기를 끌었는데, 공연이 있은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여인들 사이에 초립동 모자가 유행했다.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 공연을 마친 뒤 다시 파리의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을 때 객석에는 파블로 피카소, 장 콕토, 로맹 롤랑도 앉아 있었다. 이후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 때는 존 스타인벡과 배우 찰리 채플린이 구경하러 왔고 배우 로버트 테일러는 그녀의 춤에 반해 영화 출연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 어렵던 시대에 그녀는 어떻게 글로벌 춤꾼이 되었을까.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서울에서 양반집의 넷째로 태어났다. 숙명여학교에서 전교 2등을 할 만큼 수재였던 그녀는 26년 봄 일본 신무용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경성(서울) 공연을 본 뒤 운명이 바뀌었다. 최승희는 그를 따라 일본에 갔고 천부적인 창의성과 열정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일제 막바지 최승희는 위문공연단으로 동원돼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사회주의자인 남편 안막은 평양으로 갔다. 최승희는 이듬해인 46년에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탄다. 예술가였던 그녀는 남편보다 자유가 더 필요했을까. 그러나 오자마자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 명단에 오른다. 그녀는 그해 7월 도망치듯 38선을 넘었고, 북에서 김일성을 만나게 된다.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 김일성의 질문에 최승희는 살러 왔다고 말했고, 김일성은 대동강변의 요정 동일관 자리에 무용연구소를 차려준다. 남편은 이후 문화부와 문화선전부 부부장에 오르지만 59년 숙청 때에 사라진다. 최승희 소식이 나온 것은 86년이었다. 신상옥 감독은 “그녀가 중국으로 가다가 잡혀 처형된 것 같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사망 일자가 나온 건 그로부터 17년 뒤였다. 전 세계가 열광했던 천재 무용가 최승희. 식민지와 이념의 질곡에 갇혀 헤매다 스러진 그녀는 아직도 조국에선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당대를 주름잡던 스타들의 넋을 빼놓은 최초의 ‘한류’가 그녀다. 이제 최승희를 제대로 평가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

2009-08-16

[그때와 지금] 북극항로 찾다 숨진 바렌츠 선장, 목숨보다 신용···네덜란드 상인정신

1653년 7월 30일 네덜란드 하멜 일행을 태운 상선 스페르베르 호가 대만을 떠났다. 그들은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도중 태풍을 만났다. 닷새 동안의 악전고투 끝에 제주도에 표류한 것은 8월 16일이었다. 조선에 상륙한 '최초의 서양인 집단'이었던 하멜 일행은 그 뒤 13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일본으로 탈출했다. 이 배의 서기였던 하멜은 조선 땅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보고서 형식으로 집필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하멜 표류기'다. 하멜이 표류한 것은 조선조 효종 때였다. 조정은 하멜 일행이 십수 년간이나 억류되어 있었는데도 어느 나라 사람인 줄 몰라서 남만인이라고만 부르다가 그들이 탈출한 뒤 일본 정부에서 보내온 외교 서한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네덜란드 사람인 것을 알았다. 네덜란드인이 전 세계를 누비며 말 그대로 '세계경영'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하멜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랐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 네덜란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멜 표류 사건 반세기 전인 1596년 여름 네덜란드인 선장 빌렘 바렌츠(1550~1597)는 교역로를 찾기 위해 북극해에 진입했다. 아시아에 도달할 최단 항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고 모험에 나섰다. 그는 북극해에서 빙하에 갇히게 되었다. 선장과 17명의 선원은 동토에 올라 배의 갑판을 뜯어 움막을 짓고 영하 40도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며 겨울을 보냈다. 식량이 떨어져 북극곰과 여우를 사냥해 허기를 달랬다. 괴혈병에 시달리던 선원들은 1597년 6월 13일 작은 배 두 척에 나눠 타고 바다에 나섰지만 1주일 뒤 쇠약해진 바렌츠 선장은 숨을 거뒀다(그림). 50일 뒤 러시아 상선에 구조될 때 생존자는 12명이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감동했다. 위탁받은 화물에는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되는 옷과 약품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화물에 손을 대지 않고 고스란히 네덜란드로 운반해 고객에게 건네주었다. 목숨 걸고 신용을 지켜 후세에 길이 남을 상도덕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 유럽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고 번영의 꽃을 피웠다. 하멜 일행은 무역을 위해 네덜란드를 출발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네시아.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가던 중 제주에 표류했다. 험난한 바닷길을 헤쳐 온 그들에게는 목숨보다 신용을 중요시한 투철한 상인정신이 있었다. 네덜란드 경제 번영의 비결은 '신용'이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14

[그때와 지금] 해방은 비극의 원천이면서 민족사의 획기적 전환점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폭탄 앞에 '전원옥쇄'를 외치며 '본토결전'을 다짐하던 일본은 무릎을 꿇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5년 만에 그 종언을 고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나 해방의 감격을 온몸으로 분출하는 사진 속 독립투사들과 이들을 에워싼 모든 이의 마음은 홍명희의 시구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날의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힘으로 싸워 얻지 못한 연합군이 준 '은혜의 선물' 해방은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가진 판도라의 상자였다. 38도선을 경계로 한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에 따른 남북분단 520만 명이 희생된 동족상잔 그리고 냉전의 첨예한 대결장화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우울한 해방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축복이 아닌 저주로 다가왔다. 이렇듯 해방은 비극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우리의 잠재력을 역사상 최고조로 발산하게 해준 획기적 전환점으로도 자리매김할 수 있다.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볼 때 해방은 미국과의 유대를 바탕으로 해양지향의 열린 사회로 급속히 진화해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게 한 계기였으며 '남녀동권 사회'와 '타자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꿀 만큼 성장하게 만든 희망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우리 현대사의 부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성찰 과잉의 시각이나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하는 자긍 과잉의 시각 모두 오늘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역사인식으로 미흡하다. 미래를 위한 바른 거울로서 성찰과 자긍이라는 두 날개를 함께 펼친 균형 잡힌 역사 쓰기가 더없이 필요한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대사〉

2009-08-13

[그때와 지금] '반인륜 범죄' 단죄한 뉘른베르크 법정, 개인에게 책임물어 국제법 발전에 공헌

1945년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은 나치당 전당대회 개최지였던 뉘른베르크에 국제전범 법정을 설치하고 나치의 주요 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웠다(사진). 피고인석에 앉은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앞줄 맨 왼쪽 헌병 옆에 앉은 사람이 나치 제2인자이자 공군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으로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이 되기 전에 자살했다. 45년 11월20일에 시작된 재판은 46년 8월31일 피고인들의 마지막 진술을 끝으로 심리 절차를 마쳤고 이어 9월30일과 그 이튿날 속개된 판결문 낭독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역사상 처음으로 '반인륜 범죄'를 규정하고 전쟁 책임을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물음으로써 국제법 발전에 획기적으로 공헌했다. 또한 재판 과정을 통해 나치의 재발을 막는 교육 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긍정적 효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독일인들이 이 재판을 '승자의 재판'으로 인식하면서 재판의 긍정적 의미가 축소됐다. 46년 가을이 되자 독일인들은 전범을 오히려 '희생양'으로 간주하면서 공개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49년 9월 서독 정부가 공식 출범하자 독일인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새 정부에 촉구했다. 경제 회복에 필요한 경제.행정 부문의 엘리트들이 나치 전력자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있는 현실도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50년대는 '외부에서 강요한' 과거 청산이 추동력을 잃고 '재 나치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치 청산이 퇴색했다. 쫓겨난 수많은 관료.군인들이 복귀했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 부흥에는 끈질긴 '나치 정신'이 일조했던 셈이다. 서방 연합국이 이를 묵과한 것은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 때문이었다. 과거 청산보다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는 게 급했다. 50년대는 '나치 때 저지른 죄를 부인하고 그것을 잊으려는 두 번째 죄를 짓던 시기'였다. 진정한 과거 청산이 시작된 것은 60년대 이후였다. 61년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뭐니 뭐니 해도 세대 교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 교육과 인권의식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68세대'는 엄격한 도덕성을 주장했고 앞선 세대의 부당한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독일 시민사회의 성숙에서 비롯됐다. 반듯하게 자란 젊은 세대가 나라의 희망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12

[그때와 지금] '탈아론' 주창한 후쿠자와 유키치, 침략전쟁 정당화한 일 우익의 원조

일본의 대표적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 1854년부터 네덜란드와 영국의 근대학문인 난학과 영학을 독학으로 깨친 그였지만 1862년 유럽 탐방 시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책 속 세상과 너무도 달랐다. 1862년 파리의 국립 자연사박물관에 들렀을 때 찍은 전통 사무라이 복장에 칼을 찬 그의 사진(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소장)이 말해주듯이 메이지 유신(1868)보다 33년 앞서 태어나 정확히 33년 뒤에 숨을 거둔 그의 머릿속은 서구 '근대'와 일본 '전통'이 서로 충돌하는 전쟁터였다. 그러나 그때 서양은 문명이고 동양은 야만이라는 비서양에 대한 서양의 차별논리인 오리엔탈리즘은 그의 뇌리 속 깊숙이 파고들어 각인되었다. 이제 그의 눈에 조선은 연대하고 협력할 상대가 아니라 일본이 '문명화'시켜야 할 침략의 대상으로 비춰졌다. 1885년 3월 16일자 지지신보에 실린 '탈아론'은 이를 웅변한다. "오늘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 대오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여 저 중국.조선과 접촉하는 방법도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특별히 봐줄 것이 아니라 바로 서양인이 이들과 접촉하는 방식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악우와 친하게 되면 악명을 면하기 어렵다. 우리는 진심으로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 여러 나라를 멸시하고 침략을 긍정했던 그는 침략의 과거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애써 분칠하려는 우익세력과 일본 열도에서 불기 시작한 혐한류를 낳은 아버지다. 1만엔권 지폐의 초상인물로 후쿠자와가 살아 숨쉬는 오늘. 한 세기 전 쓰라린 실패의 역사에 도돌이표를 찍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만 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8-11

[그때와 지금] 육 여사 쓰러뜨린 비운의 흉탄···35년 전 8·15의 못 잊을 비극

1950년 8월 피란지 부산의 영도다리 옆 한 음식점. 맞선을 보던 26세 육영수는 이날 군화를 벗고 있는 34세 박정희에게 반했다. "그는 뒷모습이 참 든든했죠." 얼굴은 속일 수 있어도 뒷모습은 못 속인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부친은 전란 중에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군인에게 딸을 주는 게 불안해서 반대를 했다. 하지만 딸의 마음을 꺾진 못했다. 그해 12월 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를 맡은 허억 당시 대구시장(작고)이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이라고 잘못 말하는 바람에 식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52년 7월 박정희는 '영수의 잠자는 얼굴을 바라보고'라는 시를 짓는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그대의 그 눈 그 귀 그 코 그 입/그대는 인(仁)과 자(慈)와 선(善)의 세 가닥 실로써 엮은/ 한 폭의 위대한 예술." 74년 8월 15일 아침 청와대. 광복절 기념식 참석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육 여사의 어머니 이경령 여사가 청와대 2층에서 내려왔다. 영부인은 문을 나서며 "어머니 오늘 주사 맞으시고 이따 텔레비전 꼭 보세요. 제가 나올 거예요"라고 말했다. 국립극장 앞에서 대통령이 성큼성큼 걷자 뒤에서 아내는 말한다. "저 좀 보세요. 천천히 함께 가세요." "그래. 속도를 줄일 테니 당신은 속도를 좀 내시오." 마지막 대화였다. 오전 10시6분 대통령이 축사를 시작했을 때 탕 탕탕 총소리가 들렸다. 단상에 앉아 있던 영부인의 상반신이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사진> 대통령이 나직이 소리쳤다. "저기 우리 식구한테 가봐." 소란이 가라앉자 대통령은 연설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거의 변함없는 목소리로 연설문을 끝까지 읽었다. 퇴장 때 그는 아내가 앉았던 피투성이 초록색 의자에서 고무신 한 짝과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범인으로 체포된 재일동포 문세광(당시 23세)은 그해 12월 20일 사형된다. 8월 16일 청와대 빈소. 대통령은 눈물을 매단 채 말했다. "언젠가 한센병 환자를 방문했을 때 저 사람은 일일이 악수를 하더군. 그 뭉개진 손을 꼭 쥐어 내게 건네주기도 했지. 그래서 나도 선뜻 그 손을 잡았어." 지난해 육 여사가 목숨을 잃은 현장인 국립극장에서 연극 '육영수'가 상연됐다. 육 여사가 아르헨티나의 에비타에 비견되는 건 사심 없고 열정적인 인간미 때문이 아닐까.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

2009-08-09

[그때와 지금] 대영제국 천재 공학자 브루넬,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모든 과학기술 분야가 고도로 전문화돼 있는 우리 시대에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성을 인정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19세기 영국의 엔지니어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1806~1859)은 터널.교량.철도.조선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브루넬이 뚫은 템스 강 하저터널은 지금도 런던 지하철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클리프턴 현수교의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다. 자금 부족으로 교량을 완성시키지는 못했지만 브루넬은 높은 명성을 얻었고 1833년 27세의 나이로 런던~브리스톨 간 '그레이트웨스턴 철도' 건설의 책임자가 됐다. 3200㎞에 달하는 철도가 브루넬의 감독 아래 건설됐다. 이 정도만 해도 한 사람이 짧은 생애 동안 성취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브루넬은 조선공학에서도 획기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1838년 세계 최초의 대서양 정기 횡단 목제 외륜증기선 '그레이트웨스턴호'를 건조했다. 이어 세계 최초의 스크루 추진 철제증기선 '그레이트브리튼호'가 1845년 대서양 항해에 투입됐다. 이 배는 대서양보다 긴 노선에서는 연료를 추가 공급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브루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배는 '그레이트이스턴호'였다. 이 배는 당시 바다를 떠다니던 최대 선박보다 4배나 컸으므로 연료 보급 없이 세계를 일주할 수 있었다. 1858년 건조된 이 배는 1899년까지 세계 최대 선박이었다. 사진은 브루넬이 1857년 그레이트이스턴호의 거대한 쇠사슬 닻줄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브루넬은 자신이 선택한 모든 분야에서 지극히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공학자였다. 2002년 BBC방송이 '영국 역사의 대표 인물 100명'을 여론조사로 선정할 때 브루넬은 처칠에 이어 당당히 2위에 올랐다. 브루넬이 공학을 선택한 이유는 19세기 영국이 그의 비범한 창조력을 분출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조건을 제공하는 부문이 공학이었기 때문이다. 대학입시에서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각하고 그나마 배출된 과학인재 상당수는 의.치의학대학원 등으로 향한다고 한다. 맘 놓고 일할 수 있는 이공계 직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 수많은 '브루넬'이 자라날 여건을 마련해 줄 경세가는 정녕 없는 것일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07

[그때와 지금] 러일전쟁 이긴 일본 찬양했는데···식민지 조선은 '타고르 짝사랑'

오늘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년)가 긴 잠에 든 날이다. 1912년 영문시집 '기탄잘리(Gitanzali)'가 영국에서 나온 지 7개월 만에 그는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서구인들의 눈에 그는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서구에 동양의 지혜를 전해 줄 성자나 예언자로 비쳤다. "우리 타고르 선생이 가장 영예 있는 노벨상을 받았으니 실로 동양 사람으로는 효시라. 선생으로 말미암아 인도의 면목이 일신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동양인 전체의 명예라 할지로다." 그의 시를 이 땅에 처음 소개했던 진순성은 그를 '우리'로 불러 동일시했다. 강한 서구를 선망한 이 땅의 독자들도 서구가 인정한 그의 시 세계에 환호를 보냈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는 등촉(燈燭)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주요한의 번역으로 실린 '동방의 등촉'이란 그의 시는 일제 치하 이 땅 사람들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 준 격려의 송가로 해석됐다. 희망을 잃은 암울한 그때 우리의 문화적 저력을 인정해 준 이 시구 하나로 그는 오늘까지 이 땅의 사람들 뇌리 깊숙이 '우리 편'으로 살아 숨 쉰다. 그러나 '바다 기슭에 밤은 밝고/ 핏빛 구름의 새벽에/ 동녘의 작은 새/ 소리 높이 명예로운 개선을 노래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을 찬양한 이 시는 타고르는 우군이었다는 고정관념과 충돌한다. 그는 식민지 인도가 영국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을 러일전쟁에서 봤다. "일본은 아시아 속에 희망을 가져왔다. 우리는 해 돋는 이 나라에 감사한다. 일본은 수행해야 할 동양의 사명이 있다." 그때 그는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을 응원한 일본 편이었다. 타고르의 '일본 찬가'는 그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아전인수식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음을 명증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8-06

[그때와 지금] 미군 덕분에 자유 찾은 프랑스, 온 사회에 '미국 신드롬' 퍼져

1944년 6월6일의 노르망디 상륙에서 8월 25일의 파리 해방을 거치는 동안 프랑스인의 미국인에 대한 호감지수는 급격히 치솟았다. 사람들은 미군을 해방자로 열렬히 환영했다. 미군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지프를 타고 다니며 거리의 시민과 아이들에게 담배와 껌을 나눠주었다(사진). 전쟁 기간 동안 가난과 결핍에 시달리던 프랑스 어린이들은 미군의 부유함과 후한 인심에 놀랐다. 그들은 매사에 여유만만하고 자신감에 찬 것처럼 보였다. 물론 모든 프랑스인이 미군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을 인정하길 꺼리는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농민들이 러시아 평원에서 독일군을 격파함으로써 승리의 사전작업을 수행했고 미군은 지리멸렬해진 독일군을 맞아 싸운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파리를 해방시킨 것이 미군 제2기갑사단이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 쇼크'가 프랑스에 넘쳤다. 1946년 5월28일 미 국무장관 제임스 프랜시스 번스와 프랑스 총리 겸 외무장관 레옹 블룸 사이에 협정이 맺어졌다. '블룸-번스 협정'은 미국 영화 수입에 대한 모든 종류의 제한을 철폐했다. 그해 6월22일 레옹 블룸은 '미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협정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실토했다. 그 결과 프랑스의 스크린을 미국 영화들이 온통 점령하게 되었다. 1947년 상반기에 영화관들은 미국 영화를 337편 상영했지만 프랑스 영화는 54편 상영하는 데 그쳤다. 배우 겸 연출가 루이 주베(1887~1951)가 이런 상황에 대한 저항운동의 선두에 섰다. 좌파가 그를 지지했다. 다행히 미국과의 협정은 이듬해 개정되었다. 언론은 미국식 생활방식을 다룬 수많은 기사를 실었다. 1954년 '마리 클레르' 복간호 독자란에는 미군과 결혼한 프랑스 여성들의 편지가 실렸다. 여러 해 전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던 그들은 단독주택의 안락함 자가용 자동차 사교 모임 등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결과 '미국의 물질주의'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여성 독자들은 대서양 건너에 지상낙원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품게 되었다. TV에 비친 미국인들은 어려운 문제도 없고 걱정거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성공의 화신들처럼 보였다. 일부 프랑스 부모들은 TV에서 방영되는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자녀들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비슷한 환상이 자라나고 있었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05

[그때와 지금] '일자리 많이 만들고 사회 환원'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의 신념

"미국의 문물을 배워 조국 동포를 구하라." 1904년 아홉 살짜리 유일한(1895~1971)은 아버지의 당부를 가슴에 새기며 유학 길에 올랐다. 기독교 신자의 가정에 입양된 그는 근면과 절약 정신을 온몸 가득 익혔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16세 때부터 구두를 닦고 신문을 돌리며 고학으로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중국 물품을 들여다 팔아 학비를 댄 미시간 대학 재학 시절부터 상재(商材)가 빛을 발했다. 1919년 대학 졸업 후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들어간 그는 안정된 직장에 안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몸 안에서 꿈틀대던 기업가 정신은 그를 창업의 길로 이끌었다.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숙주나물 통조림을 개발해 새 시장을 개척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27세 나던 1922년 '라초이(La Choy Co.)' 식품회사를 세워 4년 만에 5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숙주나물의 원료 녹두의 안정적 공급처를 구하러 중국 출장 길에 나선 1924년 그는 20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가족을 북간도에서 상봉했다. 그때 동포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상업으로 국가를 살리고 개인도 살릴' 방도를 궁리했다. 2년 뒤 귀국해 병든 동포를 구하는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세웠다. "항상 국민보건을 위해 일하라. 우리 민족은 일본보다 못하지 않으니 민족의 긍지를 갖고 일하라. 유한은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 직원 조회 때마다 토로한 그의 기업정신은 일제 치하만이 아니라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1937년 그는 주식을 사원들에게 나눠주어 기업을 종업원과 공유해야 한다는 지론을 실천에 옮겼다. 그때 시작된 유한양행의 종업원지주제는 1973년 제도화되었다. 직원들과 손을 맞잡고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웃음 띤 얼굴(사진 앞 중앙=조성기 '유일한 평전')은 나눔이 주는 마음의 풍요를 잘 보여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8-04

[그때와 지금] 무능한 국방장관 수홈리노프···러시아 참패, 왕조 멸망 불러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러시아 국방장관 블라디미르 수홈리노프(사진 왼쪽.1848~1926)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전쟁 초기부터 독일군에 패배를 거듭했고 로마노프 왕조는 1917년 레닌 혁명으로 종말을 고했다. 수홈리노프는 1877년 터키전쟁에 젊은 기병장교로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워 성 조지 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는 이 전투에서 얻은 군사지식을 영원한 진리로 믿었다. 창검 대신 '화력(火力) 기술혁신'에 관심을 갖는 참모들을 여지없이 꾸짖었다. 그는 '현대전'이란 표현을 들으면 거북한 느낌이 든다며 "전쟁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1906년 시골 주지사의 23세 된 아내에게 반한 58세의 수홈리노프는 음모를 꾸며 날조된 증거로 남편을 이혼시켜 쫓아내고 이 아름다운 이혼녀를 네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아내는 파리에서 의상을 구입하고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성대한 파티를 즐겼고 수홈리노프는 아내의 사치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이런 사람이 1908년부터 1914년까지 러시아 국방장관을 맡고 있었다. 낡은 이론과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면서 창검이 총알보다 우월하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포탄.소총.탄창을 증산하기 위한 공장 설립에 노력을 쏟지 않았다. 서방 군대가 포 1문당 2000~3000발의 예비포탄을 확보한 데 비해 러시아는 포 1문당 850발의 포탄으로 1차 세계대전을 시작했다. 얼마 전 한국의 주요 인터넷 사이트가 무방비 상태로 디도스(DDoS) 공격에 당했다. 미국.일본 같은 선진국은 전체 IT 예산의 10%를 보안에 투자하지만 한국은 1%에 불과하다고 한다. 혹 우리 안에도 수홈리노프가 있는 건 아닐까.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2009-08-03

[그때와 지금] 기생 600년···조선 초 의녀에서 유래,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 앞장서기도

태종 6년(1406년) 실록은 기생의 유래를 말해준다. 내외하느라 의원에게 손목 내보이길 꺼려 진맥도 받지 못하고 죽는 여인들의 사례가 빈발하자 태종이 "제생원에 명하여 동녀에게 의약을 가르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의녀들은 나라 행사에 나가 노래하고 춤추는 관기 노릇도 했으니 오늘날 기생의 유래라고 할 수 있다. 서화와 시작에 있어 기생은 사대부에 필적하는 고급문화의 주체였다. 그러나 몇몇이 양반을 조롱하는 시조까지 남겼다 해도 사회적으로는 천민에 지나지 않았다. "이 양반이… 저 양반이…" 하며 시비를 다툴 만큼 양반의 권위가 실추된 일제 강점기에 '상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된 기생의 민중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기생들은 '누구라도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장 밑의 꽃' 노류장화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남성 지배사회와 식민지라는 이중의 질곡 아래에서도 그네들은 남녀 동권 운동의 선구로 나아가 대중문화 건설의 주체로 우뚝 섰다.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운동에 수원.해주.진주.통영의 기생들이 앞장서 참여했으며 1930년대 카페의 여급으로 진화한 기생의 후예들은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의 꿈을 불 지핀 '불령선인'이자 '불령스타'로 경찰의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장한'(1928)이란 기생들의 잡지 창간호에 실린 '첫소리'란 글에서 기생 김채봉은 "우리도 눈을 떴습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우리도 사회적으로 평등적으로 살아 보겠습니다"라고 당당히 외쳤다. 기생 오은희.최옥진.박금도는 끽다점 '비너스'의 마담 복혜숙 바 '멕시코'의 여급 김은희 그리고 영화배우 오도실.최선화와 연명으로 '일본 제국의 온갖 판도와 아시아의 문명도시 어느 곳이든 다 있는 댄스홀'을 서울에도 허용할 것을 촉구하는 '경성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글을 '삼천리'(1937)에 기고했다. 이제 기생들은 더 이상 '말귀를 알아듣는 꽃(解語花)'이 아니라 대중문화를 이끄는 당당한 주체로 거듭났다. 그렇다고 해도 오른손에 술대를 쥐고 거문고를 타는 홍의녹상 어린 기녀 좌우에 벌여 앉은 동기들의 눈매가 처연하다 못해 애처롭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발행된 우편엽서에 실린 사진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31

[그때와 지금] 인왕산 호랑이 잡던 명포수들, 일제에 총 뺏기고 몰이꾼 전락

서울의 무악재가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모여 넘었다 하여 모아재로 불리던 시절. 호환(虎患)은 구중궁궐 속 제왕마저 떨게 만들었다. 1893년 12월12일(음력) 임금이 직접 지휘하는 친군(親軍) 소속 모든 병영들은 비상이 걸렸다. 그 날짜 '승정원일기'에는 장위영.총어영.통위영.경리청이 포수를 풀어 호랑이를 잡겠다며 다투어 올린 보고들이 그득하다. 호환은 그 시절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들이닥칠 수 있는 일상사였다. 공포의 화신 호랑이에게도 천적은 있었다. 중국에서 높은 값으로 거래되는 뼈와 가죽을 노린 호랑이 사냥꾼들이다. 1900년께 서울 근교 산자락에서 짚신 신고 장죽 물고 화승총을 어깨에 멘 채 당당히 버텨 선 세 사람(사진)은 제법 명성을 떨친 명포수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뒤 이들은 더 이상 총을 들 수 없었다. "일인이 병기를 금하여 어느 사람이든지 감히 총을 사용치 못한다. 이제는 산중 영웅이 서울 남대문까지 종종 심방하며 짐승을 만나는 사람은 죽지 않으면 물려갈 뿐이라." 1914년 5월6일자 '국민보'는 무력저항을 우려한 일제가 민간의 무기 소지를 금함으로써 호환이 서울 도심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 상황을 전한다. 그때 담대했던 호랑이 사냥꾼들은 신식 연발총을 든 일본인과 서구인 엽사들의 몰이꾼으로 전락했다. 1917년 11월14일자 '매일신보'는 일본인 정호군(征虎軍) 100여 명의 입국을 보도했다. 한 달여 동안 이들은 2마리의 호랑이를 잡았다. 1930년대 이후 이 땅에서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궁중과 산중의 제왕을 모두 제압한 일제는 요순우탕(堯舜禹湯)에 이어 맹수를 몰아내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해준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아니었다. 그때 일제는 이 땅의 민초들의 삶을 위협한 또 다른 모습의 포식자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200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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